땅과 바람과 물

인류의 위기와 해결책

색즉시공 2005. 8. 18. 12:17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류의 위기

 

인류의 두 번째 위기는 폐기물 부작용으로 인한 자연환경 파괴와 공해 등의 환경오염 문제이다. 그 가운데 공기오염을 먼저 살펴보면, 이것은 정말 아주 심각한 상태이다. 생명체가 존재하는 데 가장 기본인 공기가 오염되지 않은 곳이 이제는 별로 없다. 배기가스는 자꾸 늘어나는데, 정화를 하는 산림은 갈수록 더 많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지구의 공기 가운데 1/3을 정화하는 아마존 원시림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래서 전 세계의 환경운동가들이 산림파괴를 막고 있다. 아마존 유역 원주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이 있어도 그곳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희생당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존 유역의 나무를 베어내지 않으려면 숨쉬는 데에 세금을 매겨서 아마존 유역 원주민들에게 가져다주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하다. 사실 공기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이다. 시골에서 자면 다른 때보다 잠을 훨씬 적게 자도 상쾌하다. 서울에서 자면 많이 자도 늘 피곤하다. 앞으로는 광스모그와 오존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전부 코 막고 집에 뛰어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북한산에 올라가서 서울을 한번 내려다보면 그 안에서 산다는 것이 겁날 정도로, 뿌옇게 보이는 가스층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다.

다음으로 수질오염의 문제가 있다. 앞에서 들었던 식수오염과 농업용수 오염 말고도 지하수 오염이 있다.

그 다음이 식품오염 문제이다. 비료, 농약, 제초제를 써서 대량생산을 하니 수질, 토양, 공기가 오염되고 그에 따라 식품이 온통 오염되고 있다. 야채류는 농약에, 육류는 동물성 사료에, 조미료는 화학첨가물에 오염되어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건강이 유지되겠는가.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공기, 물, 식품이 모두 오염됐는데 색깔 고운 루주를 바르면 뭐 하겠는가. 그렇게 살면서 고급 구두는 신어서 뭐 하고, 그렇게 살면서 금반지는 끼어서 뭐 하겠는가. 결국 ‘삶의 질’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나물 먹고 물 마시더라도 공기 좋은 데서 사는 것이 좋은지, 탁한 공기를 마시고, 탁한 음식을 먹고, 더러운 물 마시면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본질적으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그 다음 문제가 폐기물 문제이다. 우리가 똥을 누면 다 어디다 갖다 버릴까? 놀랍게도 전부 물에 갖다 버린다. 당연히 물이 썩는다. 예전에는 사람 똥도 다 거름이라서 이웃집에 가서 놀다가도 똥 마렵거나 오줌 누고 싶으면 얼른 자기 집에 가서 해결했다. 소중한 거름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소똥도 자기네 소의 똥, 남의 집 소의 똥이 있어 자기네 소가 눈 똥은 자기가 가져갔다. 남의 집 소의 똥을 가져가면 도둑놈이라고 욕을 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 똥은 밭에 버릴 수 없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 방부제가 많아서, 사람 똥으로는 거름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전부 화학비료를 치기 때문에 가축의 똥도 남아돈다. 그러니 결국 똥을 전부 배에 싣고 바다에 갖다 버린다.

쓰레기 문제가 또 대단히 큰 문제이다. 이제까지 서울 사람들은 쓰레기를 경기도에 갖다 버렸다. 그러나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 경기도에서 서울 쓰레기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도시에서 나온 쓰레기를 시골에 갖다 버리고 그 동네에 몇백만 원씩 지원금을 준다고 해도 촌 할머니들까지 머리띠 둘러매고 반대해서 쓰레기장을 만들지 못한다. 이런 형편이기 때문에 요즘은 쓰레기 소각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든다. 그런데 돈을 준다고 해도 경기도에서 쓰레기를 안 받아주면 서울 사람들의 쓰레기를 어디에 버려야 할까? 당연히 서울시 안에서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구에서 하겠는가? 각 구마다 모두 반대한다는 머리띠를 두르고 나설 것이다. 그러면 자기 구 쓰레기는 자기 구 안에서 처리한다고 치자. 이번에는 어느 동에다 소각로를 만들지 고민이다. 각 동마다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이다. 결국 자기 동 쓰레기는 자기 동 안에서 해결하라고 한다면, 그럼 쓰레기 소각로를 과연 누구 집 앞에 세워야 하는가? 당연히 집집마다 반대할 것이다. 결국 자기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자기 집에서 처리하자고 할 수밖에 없다. 쓰레기는 태우면 공기오염이 되고, 땅에 묻으면 토양오염이 된다. 쓰레기가 적게 나오는 삶을 살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그 밖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위기


그 밖에도 현대문명에 닥친 위기는 무척 많다.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대표적인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전자파이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전자파 피해자가 하루가 다르게 생겨날 것이다. 옛날에는 이런 걱정을 안 했는데 지금은 컴퓨터를 쓰면서, 핸드폰을 쓰면서, 가전제품을 사용하면서 전자파 걱정을 해야 한다. 뇌에 장애를 불러일으킨다는 연구 때문에 영국에서는 미성년자가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뇌에 무슨 돌연변이를 일으킬지도 모르는데 최신형 핸드폰을 갖고 있다고 자랑할 게 아니다.

교통체증과 인구밀집도 현대사회의 문제이다. 쥐도 좁은 공간에 오래 놓아두면 미친다고 한다. 사실 우리가 사는 도시환경은 사람이 미치기에 딱 좋다. 밀집해서 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교통체증은 엄청난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준다.

소음공해, 약물남용, 여러 가지 화학섬유의 부작용, 주택 재료인 석면의 부작용과 같은 문제도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20년 전에 건물을 지으면서 내부 칸막이로 모두 석면을 쓴 20층짜리 빌딩이 하나 있다. 그러다 석면 사용을 전면 금지하면서 그 건물을 쓰려면 석면을 다 뜯어내야만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석면을 취급하는 것이 위험해서 그런지, 비용문제 때문에 그런지 아무도 손을 못 대고 건물을 비워둔 채로 방치하고 있다.

서양인들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펴면서 한국의 선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는 한 스님이 미국에서 큰 빌딩을 300만 달러에 사려고 했다. 그런데 지하에 묻혀 있던 기름탱크가 문제였다. 도시가스를 쓰면서 기름탱크는 폐쇄되었는데, 빌딩을 산 사람이 의무적으로 그 탱크를 없애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몇십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기름탱크가 삭아서 구멍이 뚫려 땅이 오염되었을 경우에는 수천 트럭이든 수만 트럭이든 땅을 파서 갖다 버리고 새 흙을 가져다 메워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땅속의 상황이 어떤지 몰라 겁이 나서 건물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생태계 파괴도 심각한 문제이다.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던 갯벌이 사실은 정화작용을 하는 아주 중요한 땅인데 거기에 호수를 만들고 간척지를 만든다고 난리다. 이런 대규모 간척사업과 댐, 도로 건설은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한다. 결국 우리 손으로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삶의 토대를 부수는 셈이다.

생태계 파괴가 몰고 온 변화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상이변이다. 기상이변의 핵심은 온실효과에 의한 기온상승이다. 지구의 기온이 1℃만 상승해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어렵다. 기온이 높아져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이 녹아내리면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또 기온이 오르면 병충해가 엄청나게 발생한다. 엘니뇨, 라니냐 같은 현상이 일어나서 극심한 가뭄, 대형 산불, 또는 느닷없이 내리는 폭설이나 폭우의 사태가 일어난다.

오존층 파괴도 무척 심각하다. ‘CFC 가스’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찬사를 받았던 무색, 무취, 무해 가스이다. 그런데 냉매제로 각광받던 이 가스가 바로 오존층을 파괴시키는 주범이다. 오존층은 태양층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을 차단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데, 그것이 파괴된 결과 자외선이 직접적으로 사람의 피부에 닿아서 피부암 등 많은 질병을 발생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앞으로 오존층이 더욱 파괴되어서 피부암 발생률이 지금보다 높아지면 우리는 모두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우주복을 입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우주복을 입게 될 아이들은 우주복을 벗고 사는 자유로움과 기쁨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우주복을 놓고 고급 우주복과 저급 우주복으로 나누며 살 것이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러나 인간이 본래부터 그렇게 두더지처럼 사는 존재인 줄 알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 아이들은 불행하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죽임에서 살림으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자원고갈, 환경오염 등의 문제로 인류의 문명이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결국 새로운 문명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 새로운 문명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문명일까? 새로운 문명은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문명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 당면한 우리들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가장 먼저 인간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소비를 많이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잘 사는 길은 소비를 줄이는 가운데에 있다. 적게 쓰면 남고, 남으면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질 것이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 돕고 나누는 ‘좋은 벗’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적게 소비하는 삶은 적게 생산하는 구조를 낳는다. 적게 생산하면 자원고갈도 막을 수 있고 적게 쓰면 폐기물 문제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강제로 적게 써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쓰고 싶은 만큼 못 써서 마음이 헐떡거리기 때문에 괴롭다. 하지만 적게 쓰는 것이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되면 더는 헐떡거리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수행이다. 결국은 이것이 핵심이다. 내가 사는 세계가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 맺고 있다는 것, 내 똥구멍에서 나간 것이 내 입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자각하면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적게 소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헐떡이는 고통 없이 삶 속에서 적게 소비하는 생활을 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많이 쓰기 운동’이 아니라 ‘적게 쓰기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문명운동은 수행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정신적 차원의 전환과 함께 적극적인 기술개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소비를 줄일 수 있는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 절전형 제품, 절수형 제품, 에너지 절약형 제품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또한 이미 오염된 것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새로운 소비는 줄이고 이미 오염된 것들은 정화시키는 노력을 함께 해나간다면 우리들이 직면한 문제의 해결과 파괴된 것들의 복구가 가능할 것이다. 이제는 투자할 때에도 올바른 방향성을 가진 기술의 개발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과학기술 개발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개인적인 차원의 투자도 마찬가지다. 날마다 세 끼 먹고 그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밥 먹고 남을 때리는 데 힘을 쓸 것인가,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데 쓸 것인가? 자동차 사고 큰 집 짓기 위해서 돈을 벌 것인가, 굶주리고 병든 사람 돕는 데 쓰려고 돈을 벌 것인가? 개인이든 전체이든 자기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방향을 정해야 한다. 산에 가서 톱으로 나무를 베는 것이나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심는 것은 똑같은 운동이지만 그 결과는 무척 다르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돈, 정보, 힘을 ‘살림’ 쪽으로 쓰면 자기의 보람이고, ‘죽임’ 쪽으로 쓰면 자기 파괴이다.

바로 이런 변환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도 과거와는 달라졌다. ‘내가 지금 돈을 얼마나 벌고 얼마나 잘 사는가’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라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변환기에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어떤 삶을 살아갈 때 개인적으로도 행복하고, 세상도 평화로우며, 지구 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진지한 자세로 탐구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선각자이고 선구자이다. 쓰레기 문제가 있으면 쓰레기가 안 나오도록 연구하는 것, 그것이 인류 문명에 있어 더욱 진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에너지 절약형 형광등 하나만 만들어도 그냥저냥 살아가는 만 명보다 더 소중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또한 이런 삶을 살도록 다른 사람의 정신을 깨우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 된다. 이런 관점으로 사회와 사람을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