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재산 다 챙겨서 도망갔대요"-오마이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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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모를 일이다. 왜 그녀가 그랬는지... 그 말 어디까지가 참말인지...'
다시 그 남자 최씨를 찾아보았다. 길
가장자리에 버려진 빈 박스를 발로 펴서 꼭꼭 누르는데 그 무표정이라니... 처음에 몇 번 눌러 밟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춤을 추듯 몸 전체를
움직인다. 부풀어 오른 머리가 꼭 모자를 쓴 것 같았다. 얇아진 박스를 묶어 등에 짊어진 최씨가 반대편 길 건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채소전으로 쫓아가 다시 물어봤다.
"아니, 그 말 진짜예요? 참말로... 세상 무섭네."
채소전 아주머니 옆에 난로를
쬐고 있던 아저씨가 대꾸한다.
"정말이라니께... 왜 안 믿어져요?"
"… 네.… 놀랬어요."
"그게 언제 떠돌던
이야기인데 지금 놀래긴, 저래 가지고 화장품 파는 거 보면 신기하대니께."
자리로 돌아간 나는 그 남자 최씨가 그랬던 것처럼 빈
발걸음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최씨의 여자는 해맑았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가끔 내게 와서 화장품을 사갔는데 말하는 품새가 아주 고와서 나는
속으로 그녀를 좋아했다.
"저한테 맞는 것으로 알아서 주세요. 참, 그러지 말고 화장품 언니가 사용하는 거로 주세요. 우리 아이가
바를 것은 좋은 거로 주세요."
"그래요"하고 화장품을 골라 주고 가격을 말하면 "너무 깎아주시면 안돼요. 받을 거는 받으셔야
돼요"하고 생긋 웃고는 깊숙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런 날이면 마늘단에서 떨어져 나온 굵은 마늘 한 봉지와 수정과 해먹으면
좋다고 뿌리가 튼실한 생강도 함께 담아가지고 놓고 가고는 했다.
그 남자 최씨는 장사 잘하는 장꾼으로 오래 전부터 소문난
사람이었다. 제 철에 맞는 채소를 산지에서 구입해 차떼기로 떼어다가 팔아대는데 가장 일찍 새벽장에 나와 제일 먼저 떨이를 해 빈 차로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최씨의 여자는 맑은 얼굴로 웃음을 담고 돈다발을 들고 내 전 앞쪽에 있는 농협으로 들어가 예금을 하고 나오고는 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그들 부부의 상술과 노력에 찬사를 보냈다.
"아이고, 어째 그렇게 장사를 잘해요? 부러워라~"하면 그 여자는 "나는 언니가
더 부러워요"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손을 가슴에 얹고 "내가?"하고 "빈 말이라도 그런 소리하지 마요. 괜히 큰일 날라고..."하면
"정말이에요. 언니, 먼저 갈게요"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 남자 최씨는 하루 종일 장사한 자리를 청소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가 돌아가면
사람들은 집도 잘 지어 놓고 장사 잘해 돈도 많이 벌어 사놓은 땅이 금싸라기되어 소문난 알부자라고 했다.
여자는 수수했다. 뒷꿈치가
닳도록 신발을 신고 다녔고 소매끝이 헤지도록 점퍼를 입고 다녔고 파마도 하지 않고 긴 머리를 묶고 다녔지만 그 검소함 속에서도 나는 그녀가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전 앞에 앉아 파를 깐다거나 배추잎을 다듬는다거나 마늘을 깐다거나, 그녀는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장사를 했다. 가끔
내 자리에 와 있을 때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 보고는 웃었다.
"여지껏 같이 있었는데 우리 아저씨한테 문자 왔어요. 보고 싶데요.
갈게요"하고 일어섰다.
"사이가 좋은가 봐요. 아저씨는 장삿꾼 타고 났나 봐요. 얼른 가봐요. 보고 싶다는데..."
"네.
우리 아저씨 장사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요."
그녀가 뛰어가는 쪽을 바라보면 그 남자 최씨는 여자를 바라보며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좋을까...'하고 물끄러미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와 최씨가 보이지 않았다. 아주 가끔씩 생각이
났지만 돈을 많이 벌어 장을 떠났구나 그렇게 혼자 생각했다. 농협에 다소곳이 앉아 돈을 세던 최씨의 여자도 생각났지만 누군가에게 소식을 묻지는
않았다. 힘을 합해 일을 했으니 좋은 결과가 생겨 장을 떠났나 보다. 당연히 그럴 거다 했다.
지난 1월 말경, 그 남자 최씨가
나타났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달려들어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어린 나이부터 장돌뱅이였으니 얼굴이 장터의 억센 바람을 다 받아내 늘상
시커맸는데 막 자란 수염까지 더하니 딴 사람 같이 더 거칠어 보였다. 긴가 민가 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최씨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뒤돌아서 딴 짓을 하는 척했다.
내 앞에 와서 "아줌마"하고 불렀는데 나는 못들은 척 딴전을 피웠다. 그 남자의
발자국소리가 사라지고 다시 뒷모습을 바라보니 틀림없는 장꾼 최씨였다. 최씨가 가까이 가면 장꾼들은 다 물러섰다. 어떤 이는 자리를 비우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저리 가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떤 이는 빵을 주기도 했다. 빵을 받아든 최씨는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먹고 누군가 버려두고 간 빈
병에 담긴 물을 주워 마셨다. 놀래서 바라보는 내게 야채 전 아주머니께서 혀를 차며 다가왔다.
"왜 저러고 다닌데요? 장사는
안하고..."
"몰랐어요?"
"함께 살던 여자가 재산 다 챙겨서 도망갔대요. 김천서 소문난 부자였는데... 한푼도 안 남기고 다
챙겨서 도망갔대요."
"누가요? 부인이요?"
"부인은 무슨 부인... 최씨 총각요. 노총각. 마흔 넘도록 장가도 못간 노총각이었는데
그 여자 만난 거지. 재산 빼갈라고 작정하고 온겨... 데리고 들어온 두 아이 뒷바라지 다 해줘서 10년간 키워줬는데 도망갔어요. 신세
망쳤지... 뭐. 일할 기운 나겄어요? 사십이 넘어 만난 여자라는데... 그 여자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한푼도 안 남기고 다 빼가지고 도망가서
집안 쫄딱 망해가지고 최씨 엄마도 몸져 누웠다는데... 지금은 저렇게 빌어먹고 다니잖어."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다.
'그렇게 맑아보이던 여자가...'
안면만 있으면 달라 붙어서 만원만 달라고 하고... 생전에 장사할 때 그렇게
장사 잘 되어도 커피 한 잔 나눠 마실 줄 모르고 그 여자 치마폭에 백원까지 다 담아주더니...
"누가 좋아하것어. 폐인 다
되었지. 뭐. 여자 잘 만나야지... 그런 사람 서넛 더 있어요. 못 들었어요?"
"그런 사람이 또 있어요?"
... 둘러
모여 있던 사람들은 놀리기라도 하듯.
"많아요. 그런 사람... 장사뿐이 모르고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해서 쓸 줄도 모르고 돈
벌어 땅에 묻어 부자되면 어디서 소문 듣고 온 건지 순진한 사람 홀려서... 다 빼먹고 도망가는 년놈들..."
"년놈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