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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홍세화]

색즉시공 2006. 3. 16. 07:30
 “대추리를 평화촌으로!”라는 캠페인을 벌리고 있는 〈한겨레21〉 이번 호에는 “대추초등학교를 지켜내다”라는 제목의 글이 담겨 있습니다. 철거 용역과 전경들이 몰려온 3월6일 학교 정문에서 쇠사슬을 자르는 펜치를 손을 들이밀며 강제 집행을 막아내기까지 급박했던 하루를 전하고 있습니다.
   군사적 요충지에 정착한 원죄 때문일까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에게 빼앗겼고 해방 직후에는 미군에 빼앗긴 땅이었습니다. 쫓겨난 농민들은 뻘밭을 논으로 일궈냈는데 미군기지가 확장되면서 다시 또 쫓겨나야 할 판입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이곳에서만큼은 정태춘의 노래처럼, 그리고 최수동(87)님이 이번 호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현재진행형입니다.

   “...내가 재작년 8월부터 촛불 행사 댕기는데 여적지 댕기는겨. 처음부터. 얼른 그넘들 이겨내야만 안 댕기지. 그러려면 어떡하든, 늙은이래도 그냥 결심을 먹고 댕기는 거여. 땅 한 평도 안 주고, 나 손자 대물리고 그럴라고 댕기는겨. 그러고 대책위 일 보는 사람들 밤낮없이 하는 거 딱하잖어. 그러니께 기를 쓰고 다니는겨...”

   “1972년 부활절에 란자 델 바스토가 행한 15일간의 단식은 고지대의 농민들을 뭉치게 했다. 그들은 군대가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땅을 팔지 않을 것이며, 자기들의 땅을 결코 떠나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땅, 일터, 생활과 관계를 맺는 그 선언에 전국적인 지지운동이 뒤따랐다. 1972년 7월14일 르라르자크에서 로데즈로 추방될 위기에 처했던 103명의 농민들이 최초의 시위를 벌일 때부터 조제 보베의 <보르도위원회>는 이미 비폭력운동원들로 구성된 질서 유지팀에 속해 있었다” (조제 보베, 프랑스와 뒤푸르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에서)

   〈한겨레21〉 독자 중에는 프랑스의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가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 잡지의 표지 사진에 실렸고 대추리 명예 주민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가 대추리를 찾았을 때 남다른 감회에 젖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르도 대학생 시절 군사기지를 확장하려는 프랑스 군사주의에 맞서 싸웠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도시 출신이었던 그가 농민들과 함께 지켜낸 바로 그 땅에서 농민으로서 첫출발을 했기 때문입니 . 그가 대추리 주민들에게 연대의식을 느낀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나 자신 자괴감이 듭니다. 그것이 꼭 〈평택 평화의 땅 지키기〉 모금액이 -25,142,000원- 국회의원 한 명에 대한 후원금에도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 자신 연대의 대열에 가까이 가지 못했기 때문이며, 특히 이곳 주민들과 연대하는 학생운동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농업이 어떤 것인지 말해 달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말해주겠다.”
   조제 보베의 친구 프랑수아 뒤푸르의 말입니다. 대추리에는 한국사회의 모순들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 대추리 주민들이 3월16일 저녁에 올해 농사를 잘 짓기 위한 논갈이 전야제를 엽니다.
   “지난 1월 트랙터를 몰고 전국 농민들을 만나 농민이 생각하는 평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습니다. ‘평택 285만평 땅은 우리가 대신 갈아주겠다’고 말하더군요,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전국에서 몰려온 평화의 트랙터들이 평택 황새울을 가득 메울 겁니다.”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 김 챰 사무국장의 말에 힘을 얻습니다. 여기에 연대의 작은 실천들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