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세상만들기

핌과 구에라임

색즉시공 2006. 7. 20. 08:33

몇 개월 전 작가가 매 맞는 외국인 아내 아이템이 있다고 했을 때 저는 왕년에 유사 아이템 좀 했다고 하영 아는 체를 하며 되물었습니다.  안산이요 부천이요?   그때 작가의 대답은  제 생각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전라도 무안요. 이름은 구에라임, 국적은 필리핀.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도 있대요."  

서해안 고속도로 끝 목포 직전에 있는 그 무안?  아이고 꼼짝없이 출장가게 생겼습니다.   아니 그런데 대체 그런 땅끝 동네까지 어떻게 외국인들이 들어와 사는 거야? 라고 투덜거렸던 제 의문은 목포와 무안 일대를 돌아다닌지 얼마 되지 않아 꼬리를 말았습니다.   천 명 가까운 외국인들이 그 지역에서 한국인의 아내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지주의 농사 짓는 아들보다는 서울 엿장수의 실업자 아들이 그나마 더 장가가기 쉽다는 얘기를 들은 게 제가 중학교 무렵이었으니 그 고단함이야 세월이 갈수록 더했을 것이고, 결국 총각냄새 물씬 풍기는 독수공방들이 외국인 여성들로 메워진 셈이지요.   그 중의 하나가 구에라임이라는 필리핀 여자였습니다.   나이 서른 셋에 여섯살 난 아이가 하나 있었죠.  알콜 중독이 분명해 보이는 그 남편은 술만 먹으면 짐승이 됐습니다.   주먹과 발길질은 기본으로 하고 선풍기로 내리찍고 부지깽이를 휘둘렀습니다.   도대체 왜 때리느냐고 물었을 때 구에라임은 눈물을 흘리더니 동료 필리핀 아내에게 뭐라고 하더군요.  (그녀의 한국말은 매우 서툴렀습니다.)   한국어가 좀 되는 필리핀 여성이 통역을 해 줬습니다.   "이유라도 알면 얼마나 좋겠어요."

며칠 동안 그 일대를 누비면서 저는 도처에서 외국인 아내들을 만났습니다.  애 셋을 낳고 또 뱃속에 아이를 가진 태국 아줌마는 능숙한 솜씨로 떡볶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제게 구에라임의 말을 통역했던 여자는 시어머니와 농담 따먹기를 겁없이 하면서 깔깔대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아줌마가 낳은 광산 김씨 아무개 파 몇 대손의 돌 잔치는  흥겹기 그지 없었지요.  잘 사는 사람은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 상담 센터의 파일만 들추면 세상에서 다시 없는 엽기적인 남편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 사람 중에도 그 정도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저는 허다하게 봅니다.  또 한국 남편들이 전부 다 외국인 아내들에게 폭력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당연지사 사람 차이는 있는 거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 생각에 제동을 건 것은 구에라임을 만나고 돌아오는 논두렁 어귀에 어지러이 나붙은 플래카드들이었습니다.  

“말잘듣고 순종적인 베트남 처녀 상시 대기”라든가 “필리핀 숫처녀 완전 보장, 완전 후불제”  한창 익어가던 벼들과 함께 가을바람에 나부끼던 그 플래카드들과 구에라임과의 힘겨운 인터뷰가 오버랩되었던 겁니다.  그래도 이유가 있어야 때릴 거 아니냐고, 완전 또라이가 아닌 담에야 뭔가 때리면서 무슨 말이나 하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구에라임은 찔끔찔끔 나오는 전라도 사투리로 대답했었지요.  “드런 니언.....이래요.”  
“왜 더럽대요?”
“버진 아니었다고.... 결혼하고 사흘 뒤부터 때리기 시작했어요. 베이비 생긴 뒤에 배 찼어요.  더러운 씨라고.....”  

베트남 아줌마 핌을 만났을 때도 저는 때리는 이유를 하나만 대 보라고 졸랐습니다. 그때 그녀는 그녀가 구사한 한국말 가운데 가장 유창한 발음으로 남편의 말을 흉내냈습니다. 워낙 많이 들어서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 시발년아.  내가 너 데려오는데 얼마 들었는지 아냐.”

국제 결혼 가운데 가장 인기없는 건 중국이고, 요즘 인기 절정에 오른 나라가 베트남이라고 합니다.  무늬만 사회주의긴 하더라도 그래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온 티를 팍팍 내면서 권리 따지고 딱딱대기 일쑤인 중국 여인들에 비해 베트남 여성들은 우리와 비슷한 문화적 정서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아이에 대한 헌신과 집착이 왕년의 우리 어머니들의 그것과 유사하거나 때로는 상회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그런지 플래카드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나라가 베트남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들이 한국에 오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엿장사보다 농촌의 지주의 아들이 여성들에게 더 인기 없었던 나라의 농민들에게 그들에게 시집 오고 싶어하는 이방인 여인들이란 달갑고도 아름다운 인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행복한 삶을 일굼으로써 농촌 총각을 뭐 보듯 하는 여성들과, 그 여성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이 땅의 농촌 정책에 짙은 감자를 먹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플래카드들이 몸서리치게 싫었습니다.

그 플래카드들이 단순히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매개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소유’할 것을 은연 중, 내지는 노골적으로 선동하고 있으며 ‘숫처녀’를 보장하면서 남자와 여자를 수컷의 손을 타지 않은 암컷과 모든 암컷의 첫 수컷이고 싶은 수컷으로 전락시키며 그것이 결국 이방에서 온 반가운 신부가 아니라 내가 돈을 주고 사 왔으며 내가 내킬 때 팬티를 벗어야 하고 자동판매기처럼 내 새끼를 빼낼 뿐인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드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왜 한국에 들어오는 여자들은 숫처녀여야 하며, 왜 그녀는 남편에게 항상 순종적이어야 하며, 왜 그들은 도망갈 권리를 갖지 못한단 말입니까.  진정 국제 결혼이 아름답게 이뤄지려면, 우리가 결혼을 묘사하듯 인간 대 인간의 아름다운 결합이려면, 아니 아름답지는 않다 해도 서로에게 동등한 결합이려면,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만났을지언정 논두렁에 나부끼던 플래카드의 내용처럼  불공정하고도 비인간적인 거래의 결과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다행히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떠한 사유든 이혼장에 도장을 찍고 나면 외국인 아내는 일정 기한 내에 한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것이 ‘사기 결혼으로부터 내국인을 보호하는’ 목적이었는지 모르나 그 조항은 수많은 외국인 아내를 부당하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내모는 칼이었고 도끼였고 부지깽이였고 삽이었고 몽둥이였습니다.

  제가 열독하며 치를 떨었던 그 폭력들이 그 플래카드의 불쾌한 사생아들이었다고 생각하면 크게 어긋날지요.   잘 사는 커플들도 있으니만큼 일부 악한 남편들의 개인적 성품 탓에 기인한 바 크다 해도, 그들의 ‘결혼’과 ‘본전 생각’에 그 플래카드가 미친 영향이 미미하기만 한 것일지요.

  구에라임 케이스는 제가 개입하기 직전, 구에라임의 남편이 간경화로 병원에 실려감으로써 유야무야되었고,  핌 케이스에서는 “남편하고 이혼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래도 애 아빠예요.  방송 나오면 우리 집 나오고, 친구들 다 알아요.  그래서 하기 싫어요.”라는 베트남의 하노이의 법대생 출신이었던 핌의 거절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또 다른 구에라임과 핌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저는 또한 그녀의 후배들이 ‘숫처녀’와 ‘순종적이고 도망 안가는’ 따위의 타이틀로 치장한 채 ‘농촌에서 만지기 힘든 목돈’과 등가품이 되어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이건 페미니즘의 문제가 아닙니다.   휴머니즘의 문제입니다.

 

출처 http://www.hadream.com/zb40pl3/zboard.php?id=seoul&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