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내려온 지 어느새 13년이 되어간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괜찮다는 직장에 다니며 나름대로 잘 살고 있던 내가 시골로 온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동갑내기인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부터 남편은 마흔이 되면 농부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서른 살 내게 마흔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은, 너무도 먼 미래였다. 그렇지만 10년은 살같이 흘러갔다.
마흔 둘 되던 해, 남편이 시골로 가자고 했다.
아, 이 사람은 시골이 정말 절실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나를 돌아보니, 나는 서울에서 꼭 붙들어야 할 것이 없었다.
나는 그러마고 했다. 그렇지만 시골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거란 생각도 없었다.
시골행을 결정하고 처음 본 땅에 우리는 덜컥 자리를 잡았다.
남편 선배가 소개해준 땅에는 내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었다.
그 느티나무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실수였다. 느티나무 옆에 자리잡은 것이 실수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땅에 대해 전혀 공부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첫 단추를 잘못 꿰어서였는지, 문제가 줄줄이 이어졌다.
제일 중요한 농사부터 그랬다. 농사를 짓겠노라고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남편은 농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살면서 몸으로 익히리라, 그렇게 생각했단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만약 농사에 대해 눈곱만큼이라도 아는 것이 있었다면 그리 쉽게 내려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은 또 농사는 자기가 다 지을 테니 나는 좋아하는 책이나 읽으면 된다고 했었다.
그 말도 나는 믿었다.
시골에서 처음 맞는 겨울에 나는 진짜로 원 없이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첫 번째 농사철이 채 가기도 전에 농사란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사는 대단히 어려웠다.
첫 해는 들기름 두 병, 둘째 해는 앞밭에서 지은 고추 농사로 번 50만원이 소득의 전부였다.
본격적인 작물로 시작한 두릅은 죽을 쑤었다.
집에서 1시간쯤 떨어진 곳에 밭을 얻었는데 잘 나오는 두릅 순을 누군가가 다 베어가고 말았다.
이웃 마을에 얻은 땅에 지은 고구마와 호박은 거두지도 못했다.
마음이 바뀐 주인이 수확철 경운기 올라가는 길에 배추를 심어버린 거였다.
우리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산골짜기에 작은 다랑논을 마련했다.
이듬해는 논 옆에 작은 복숭아 과수원을 마련하여 벼와 복숭아 농사를 지었다.
선진 농원으로 견학도 다니고 친환경농업 단체의 교육도 쫓아다녔다.
유기농 인증도 받고 열심히 했지만 소득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자연에 크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3년 전이었다. 날씨가 유난했다.
봄 가뭄이 극심하더니 복숭아가 익을 무렵부터 비가 줄곧 내렸다.
비에 한꺼번에 자란 복숭아가 리듬을 잃었는지 주저앉고 말았다.
복숭아를 생물로 내는 것을 포기하고 모두 즙을 내야 했다.
무쇠 같은 남편도 무너졌다.
이틀 만에 애매미충이 온 과수원에 번져 혼비백산했던 것도 아픈 기억이다.
판매도 문제였다. 농사도 어려운데 장사도 해야 했다.
우리같이 농약과 화학비료 안 친 농산물은 일반 시장에서는 아예 경쟁이 되지 않았다.
수확량에서 밀리고 볼품도 없으니까.
소비자를 직접 찾아 나서는 방법밖에 없었다.
2000년 8월, 우리는 당시 살았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앙성닷컴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했다.
판매 이외에도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40년 넘게 도시에서만 살았던 사람으로서 도시와 농촌을 잇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예전의 나처럼 농사와 농촌에 대해 관심도 없고 또 모르는 이들에게 농사의 즐거움과 어려움 그리고
자연이 주는 위로를 알려주고 싶었다.
올해로 만 10년을 맞는 이 사이트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허공의 집이 되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도시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이들에게서 따스한 격려와 응원을 받는다.
2년 전에 우리는 10년 동안 살던 앙성을 떠나 봉화 산골로 들어왔다.
750미터 고랭지에 우리는 남회룡리에 하나밖에 없다는 논을 만들었다.
지난 봄에는 앞밭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주는 대로 거두리라, 그리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농사 지으며 사는 것이 싫지 않다. 아니,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몸이 곤해도 해가 뜨면 저절로 눈이 떠지는 것이 즐겁다.
돈은 없지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사방에 있으니 마음이 넉넉하다.
오래도록, 죽을 때까지 농사 짓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고 또 할 만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내게 귀농의 이유를 묻는다.
남편이 늘상 하는 대답대로 "그냥 내려왔다" 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저었다.
서울서 태어나 40년 넘게 그곳에서만 살았던 이가 어느날 갑자기 그냥! 시골에 내려왔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 것이다.
내가 짐작하는 남편의 귀농 이유 중 농사 말고 중요했던 것이 세 가지이다.
언제든지 마음 내키면 산에 가고,
멍들 풀어놓아 키우고,
사람들 안 만나도 되고.
위의 세 가지 중 한 가지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귀농 첫 6년, 우리가 산에 갔던 기억은 5번도 안 된다.
자리 잡고 농사 익히느라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시골에 내려오자마자 남편이 한 일이 친구집에서 강아지를 데려온 거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늘 멍들과 식구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 깊은 산골에서도 녀석들을 풀어놓고 키울 수는 없다.
성격은 다르지만, 사람들도 여전히 만나야 한다.
그렇다 해도, 남편은 잘했다, 생각하는 것 같다.
농사를 짓고 사니까.
농사에는 묘한 힘이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을 떨쳐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그 힘을 나는 자연의 위로라고 부른다.
만약 사람에게 그렇게 채이고 밟혔다면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일이니,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도 그리워하던 히말라야에 처음 갔던 것이 6년 전이다.
그해도 복숭아 농사는 엉망이었지만, 우리는 무조건 떠났다.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참으로 중요한 것을 얻었다.
나의 실체와 대면한 것이다.
내게 귀농의 이유를 대라는 분들에게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말 그대로, 내가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출처 :http://angsung.com/
'행복은 어디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에게 사람이란 무엇인가? (0) | 2010.07.14 |
---|---|
오십견 (0) | 2010.07.14 |
정말 좋았네[주현미] (0) | 2010.05.04 |
법정스님-2 (0) | 2010.03.12 |
법정스님 (0) | 2010.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