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왕꽃 선녀님!!!!!
내가 그녀를 만난 날이 아마 석달전쯤인것
같다.
누구나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에 어머니를 찾듯이 신앙인에게는, 아니 비신앙인이
라도 그런 순간이 오면 하느님을 찾는가 보다.
아무리 탕아처럼 아버지 품을 떠나있었던
사람이라도.......
어린이 병동에 흔치 않게 어른들이 가끔 입원을 한다. 다른 병실이 모자랄 때....
가족과
간병인을 통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을 듣고 환자를 방문했다.
그 첫인상이란..... 다시 뒤돌아 나오고 싶을 정도의 그
써늘함과 얼굴 곳곳에 문신
을 해서 강한 인상, 약간의 황달이 들기는 했지만 금방 불꽃이라도 튀어 나올 정도
의 매서움과 살 날이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심할 정도의 꼿꼿한
자세....
커다란 절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철저한 이론으로 신앙을 따지고 가족에게나 간병
인에게나 심지어 의료진에게까지 본인의 의도대로 모든 치료,간호 절차를 따르도록
하는 그런 철저한,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 꽁꽁얼은 빙벽속에 있는
따스함과 사랑을 이끌어 내는 일이었다.
그녀를 위해서.....하느님을 위해서......
초등학교 때 온 가족이
영세를 하고 어머니는 성모회장까지 지내시고 그녀 또한 열
심한 학생, 청년시절을 보냈고 성당에서 만난 사람과 혼배 성사까지 하였다.
두 아들을
낳아서 성당 성모 유치원에 보낼 정도로 열심이었던 그녀에게 어느 날부
터인가 神氣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내림 굿을 받아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온 몸으로
거부해도 그녀의 운명은 그렇게 바뀌고 말았다.
어린 아들들의 울음을 뒤로 한 채 보따리 하나만을 덩그러니 끌어 안은 채 고향을
떠나 온 그녀는 그 뒤 30 여년 이상을 신당을 차려 놓고 소위 '무당 질'(그녀의
표현
이다)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시댁에서 내쳐지고 아들들을 생이별하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좀 더 신을 잘 모셔서 훌륭한(?) 무당이 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단골로 드나들 정도의 이름난 무당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30 여년이 지나고 회갑이 갓 지난
나이에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간암과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과 아무리 둘러 봐도 함께 할 가족도 없는 고독,, 그
처
절함뿐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보고 서울의 좋다는
병원은
다 다니면서 수술도 여러번 하고.....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나마 가끔이라도 찾아오는 언니와 꼭 쥐고 있었던 300 만원이었다.
한달밖에 살 날이
안 남았다는 말을 믿으면서도 다시 서울대 병원에 가 보려는 계획
을 세우고 있는 동안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어렴풋해 가는
삶의 기억속에서도 자신이 영세를 받았었다는 기억 하나만으로 다시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면서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철저한 자기 통제력과 고집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않아 주변의 언니와 간병인도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한달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간을 같이하면서 그녀와 친해졌고 그녀의 신뢰받는
사
람이 되었다. 그러는 과정동안 많이도 싸웠다. 야단(?)도 치고 소리도 지르고 함께
울기도 했다.
기도도 다 잊어버려 할 줄 모르면서 내가 준 묵주를 손에 꼭 쥐고 그저
십자가에 입
맞춤만 하면서 성호경을 그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30 여년 동안 떠나 있던 하느님께
다시 가겠다며 고백성사를
보고 병자성사를 받았다. 일주일에 한번씩 봉성체를 하고......
이제 하느님나라에
갈 준비를 하겠다고 그 동안 삶의 수단이며 자신의 인생을 바꿔
버렸던 신당을 접기 시작했다. 신당을 폐쇄하기 위해 외출을 다녀 와서 그녀가 내게
말했다.
“수녀님,,, 오색 옷도, 온갖 부적도, 북도, 방울 부채도 다 태워 버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염주 하나만은 가지고 왔어요. 이건 그냥 가지고 있으면 안 될까요.“
나는 그러라고 했다.
그녀가 30 여년의 세월을 없었던 것으로 하기에는 그 녀에게
너무 가혹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염주로 힘들었던 30 여년의
삶을
남겨두라,,,,,,,
기억하라,,,,,,,
그랬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불러 올리더니 급기야는 통증(이미 신경줄을
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이 그녀의 자제력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하느님은 이 때부터 일을 시작
하시는 가 보다.
그녀의 마음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다. 난 이 때 헤어졌던 아니
버려두고 떠나왔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만나도록 권유했다.
물론 그녀의 대답은 "NO" 였다. 이제 어떻게 아들들을 찾느냐는 것이다. 그녀의 마
지막 자존심과 아들들에 대한 미안함이 강력한 거부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녀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과 다를 바 없는 어머니였다. 아들을 너무나 보고싶어하는, 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장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아들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그런 어머니
였던 것이다.
열흘 정도를 설득하다가 반 허락을 받아내었고 그녀의 언니와 의논을 한 후에
아들
들을 불러 들였다. 먼저 서울에 사는 첫째 아들이 왔다. 유치원을 다니던 모습의
아
들이 아닌 30대 후반의 건장한 아들이 나타난 것이다. 병실에서 그들의 만남은
이루
어졌고.....
그 다음 주에는 작은 아들이 왔다.
그 순간 그들에게
용서라니, 원망이니,,,, 이런 말들은 필요 없었다.
그저 ‘엄마’라는 울부짖음과 ‘내 새끼야’라는 통곡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간단한 몇 개의 단어들이 30 여년 동안 깊어져갔던 그들 사이의 반목과
원망과 미안함을 다 녹여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다, 이루었다.”“난, 이제 여한이 없다”
점점 더 심해져
가는 통증 때문에 견디지 못하던 그녀는 생면부지의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강릉에 있는 갈바리 호스피스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간호사들과 수녀님들의 지극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고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돌봄을 받는 한 달동안
그녀는 가장 행복했단다.
삶의 마지막 몇 달을 우리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채 성모님께 매달리는 어린아이처럼,
아버지께
울부짖던 예수님처럼,,, 그런 새로 태어난 아기의 모습으로 살던 그 녀가
하느님 품으로 갔다. 마지막 병자 영성체를 모신
후에..... 아주 편안하게.....
그리고 그녀의 표현대로 아주 행복하게....
마지막 목숨처럼 쥐고 있던 그
300 만원은 채 다 써보지도 못한채,
그저 한손에는 그녀의 삶을 뒤 바꿔 놓았던 커다란 염주를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에는 그녀의 새로운 생명을 약속해 주고 사랑을 가르쳐 주었던
예수님,묵주를 손에 쥔채 그렇게 그녀의 한 많은 인생은 막이
내렸다.
입관할 때 그녀가 얼마나 행복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있었다.
난 늘 그녀를
이렇게 불렀었다. “왕꽃 선녀님”(인기 절찬이었던 드라마의 이름을 따서...)
“나의 왕꽃 선녀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녀에게 비추소서.
죽은 골롬바자매의 영혼이 하느님 품에 편히 쉬어지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