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세상만들기

기구한 이주노동자의 삶[코리아포커스 펌]

색즉시공 2006. 2. 25. 08:47



 

‘오사이’(Glazing Bead : 유리 고정태) 작업은 이를테면 승진인 셈이다. 창틀과 유리 틈새를

잡아주는 일은 상대적으로 덜 고되다. 공장 경력 만 2년 넘은 그에게 좀더 수월한 일이 맡겨

진 것이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일터를 옮겨야 했던 때를 생각하면, ‘2년’이란 시간은 ‘정착’이나 마찬가

지다. BF, SF, MF, M/C…. 이름도 생소하던 작업 공정을 거쳐오면서, 쩌모르윈(36)도 발코

니창 제작 숙련공이 돼 갔다.

한국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정해져 있었다. 기술자가 되려면 손가락 몇 개를 헌납해야

가능했다. 이곳 공장에서도 전기톱은 숨차게 돌았다. 대신 ‘BF’건 ‘SF’건 공포스럽지 않았

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탁탁! 드럼통 난로에서 나무가 타오랐다. 가건물 공장 안에 온기가 돌았다. 하얀 입김이

옅어질 정도의 온기라도, 그는 고마웠다. 겨울 오후는 추웠고, 경기도 화성도 추웠다. 그에게

 한국은 추웠다.

 

난민신청, 불허, 출국권고, 그리고 소송

‘8888항쟁’(버마 군부독재에 항거해 일어난 민중 총봉기로, 1988년 8월8일에 정점에 이름)

때 쩌모르윈은 17살이었다. 민주화의 열망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의 피를 뜨겁게 덥혔다.

군대와 경찰은 악귀 같았다. 사람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총 쏘며 뒤쫓는 그들이 무서워,

그는 수 년 간 국경지대로 도망다녔다.

드르륵, 위이이이잉~

‘오사이’ 단계를 끝낸 창틀에 전기 드릴로 구멍을 냈다. ‘크리센트’(잠금장치) 조립은 위치를

잘 잡아야 한다. 두 개의 창이 한 곳에서 만날 때, 아귀가 안 맞으면 창은 닫히지 않는다. 사람

마음도 똑같다, 쩌모르윈은 생각했다. 각자 자기 마음자리를 지키면 상처를 줄일 수 있을 것

이다.
NLD(버마민주민족동맹) 멤버이자 중학교 교사 아버지도, 간호사 어머니도 일을 잃었다. 당국

은 늘 감시했고, 모든 생계활동을 봉쇄했다. 당장의 끼니가 문제였다. 자유가 고팠고, 돈이 급

했다.
쩌모르윈은 한국을 택했다. 버마처럼 군부독재를 경험했지만, 또한 극복한 나라였다. 배울 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태국에 4개월 간 머물며 입국을 준비했다. 4천5백달러를 빌려 브로커에게

줬고, 2주 관광비자를 받았다. 1997년 8월 한국에 도착했고, 2주후 불법체류자가 됐다.

 

“도대체 몇 번째야?”

아침에 쩌모르윈은 상사에게 안 좋은 소릴 들었다. 그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1월에만

빠진 날이 6일이다. 토·일요일 외에도, 한 달에 한 번씩 목요일을 쉬었다.
쩌모르윈은 NLD 한국지부 활동가다. 일요일엔 버마 대사관 앞에서, 목요일엔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했다. 5·18 때면 공장에 말하고 광주를 찾았다. 공장은 그런 그를 이해했고, 최

대한 편의를 봐줬다. 그래도 1월엔 의도하지 않게 빠지는 날이 많아지고 말았다.
‘크리센트’와 씨름하는 쩌모르윈에게 이따금 한국인 동료들이 말을 걸었고, 그는 순하게

웃었다. 쩌모르윈과 그들은 종종 어긋났지만, 대부분 잘 맞았다. ‘크리센트’ 조립이 끝나

자, 창틀 두 개가 꽉 물렸다.
99년, 한국에 와 있던 동료들과 쩌모르윈은 NLD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2000년, 스물한명

이 난민 신청서를 접수했다. 좀더 안정적인 활동을 위해서였다. 2005년 4월, 쩌모르윈을

포함한 9명에게 불허통지서가 날아왔다. 출국권고도 받았다. 버마로 돌아가면 그들의 운

명은 뻔했다.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재판결과가 나올 때까지 출국이 유예됐다. 민주화운

동으로 탄생한 한국 정부는 그들의 민주화운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에 오래 있고 싶어서 난민 신청한 게 아니다. 상황 좋아지면 버마로 돌아갈 거다.

버마에 가족도 있고, 우리가 꿈꾸는 세상도 있다. 날 버마로 돌려보내 죽게 만든다면, 좋

다. 하지만 그건 내 선택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선택이다. 한국 정부만큼은 우릴 이해해

줄 줄 알았다.”

쩌모르윈은 마음 고생이 심했고, 그때마다 항변했다.

 

“우린 ‘구분된’ 인간”

“영감, 그건 그렇게 하면 안 돼.”

언젠가부터 공장 사람들은 그를 ‘영감’이라 불렀다.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였다. 쩌모르윈

은 놀리는 거라 생각치 않기로 했다. 그는 동료들을 믿었다.
‘오사이’나 ‘크리센트’완 달리 ‘M/C’(고리살) 조립은 아무리 해도 잘 안 됐다. 이 사람 저 사

람이 시범을 보였다. 전기톱으로 크기에 맞게 자르길 수 차례, 보다 못한 상사가 가벼운 불

평을 뱉었다. 쩌모르윈은 머리를 긁적였고, 웃었다.
버마에서,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지식인이었다. 한국에서, 그는 천대받는 이주노동자

다. 버마에서 실력 있는 엔지니어였던 그의 친구도, 한국에선 욕먹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

자일 뿐이었다. 정치활동도 살아남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먹어야 했고, 몸 누일 한뼘

자리가 필요했다.
“그래, 살아야 하니까, 아직은 한국을 떠날 수 없으니까”, 쩌모르윈은 스스로를 다잡아왔다.

지난 10여년 동안, 그는 스무 곳도 넘는 공장을 전전했다. 한 달에 세 번 옮긴 적도 있었다.

30만원 되는 월급은 두세 달에 한 번 받을까 말까였고, 사장은 툭하면 신고하겠다 위협했다.

수원 사출공장, 경기 광주 가구공장, 군포 나사공장, 부곡 사출공장, 신도림 사출공장, 구로

사출공장…. 끝도 없이 흘러다녔고, 2003년 10월 화성에 와서야 그는 안도했다.

입국 직후, 쩌모르윈은 한국에 먼저 와 있던 친구를 찾았다. 친구가 일하는 단추공장 기숙

사방에 얹혀 지냈다. 작년, 그와 함께 난민신청이 거부된 친구였다.
어느날, 친구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사장은 앓고 있는 그에게 일을 닦달했다. 게으름 피우

면 신고하겠다 겁줬다. 친구는 사장이 무서워 벌벌 떨었다. 모든 불을 끈 채 방 구석에 쪼그

려 앉아, 친구는 꼼짝도 않았다. 소변은 콜라병에, 대변은 비닐봉지에 해결했다. 지켜보는

그도 끔찍했다.
그곳을 나와 다른 친구가 일하는 경기도 광주로 갔다. 한 달 같이 지내는 동안, 친구는 단

속반에 걸려 출국당했다. 그에게 한국은 버마만큼이나 공포스러웠다.

“버마가 민주화되지 못하면 숨쉬고 살 수 없듯, 한국에서 일 못하면 우린 먹지도 못한다.

인권 앞에선 버마인도, 아프리카인도, 한국인도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We are the

world’라는 말, 우린 이해 못한다. 한국에서 우린 ‘구분된’ 인간일 뿐이다.”

 

“한국에 오면 나처럼 돼”

“데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데비(버마 이름 : 메이 탄 텟 크라수)는 말없이 웃어보였다.
“라면 좀 끓여요.”

쩌모르윈이 데비에게 버마어로 말했다. 데비가 웃으며 라면 물을 올렸다. 잠시 후 공장

동료들이 들어왔고, 데비는 라면을 그릇에 나눠 담았다. 오후 4시 쉬는 시간, 공장 옆

에 붙은 작은 방에서였다. 공장 노동자들의 한 칸 쉼터이자, 쩌모르윈의 기숙사다. 며칠

전부턴 신혼방이다.

일주일 전 쩌모르윈은 결혼했다. 그는 NLD 한국지부에서 결혼한 단 한 사람이다. NLD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아이는 더더욱 안 갖는다. 신분이 불안정하기 때문이고,

부모 노릇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 갈 거야?”
데비가 물었다.
“놀이동산, 민속촌…. 명동 가서 쇼핑도 하고.”

쩌모르윈이 나름의 계획을 말했다. 이튿날 한국에 올 장인장모를 모실 그의 ‘복안’이

었다. 호주 국적 여성 데비는 쩌모르윈과 같은 까렌족(버마 소수민족으로 1940년대

후반부터 자치령 설립을 요구하며 중앙 정부와 대립 중)이다. 데비 부모는 버마

국내 상황에 염증을 느껴 호주로 이민갔고, 데비도 호주에서 성장했다.

결혼 며칠 전, 데비는 혼자 한국에 들어왔다. 양가 부모 없이, 둘은 가정을 이뤘다.

뒤따라 들어올 데비 부모완 달리, 쩌모르윈 부모는 결혼 사실을 ‘알고나 있을’ 따

름이다. 청첩장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전화 한번 하려 해도 ‘작전’을 짜야

하고, 우편물은 중간에서 사라지는 게 버마 현실이다. 결혼 사실 알린 걸로 쩌모르

윈은 만족했다.

 

데비는 부모와 함께 호주로 돌아간다. 공부를 끝내야 한다. 6개월 후, 데비는 다시

한국에 올 것이다. 한국에 오면, “쩌모르윈 가는 곳 어디든 갈 것”이다.
쩌모르윈은 결혼을 많이 망설였다. 데비의 미래를 희생할 순 없었다. 미래 없는

사람은 나 혼자로 족하다, 생각했다.

“난 언제 감옥갈지 몰라. 나랑 결혼하면 넌 버마에도 못가.”
“괜찮아.”
“그럼 결혼하더라도 호주에 살아. 이따금씩 만나면 되잖아.”
“당신 있는 곳에 나도 있는 거야.”
“한국에 오면 너도 나처럼 돼.”


데비 아버지는 교수고, 어머니는 의사다. 데비는 회계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다. 호주에서도 그들은 상류층이다. 데비가 한국에 온다는 건 이주노동자가 된

다는 뜻이었다. 쩌모르윈은 속이 바짝바짝 탔다.

“난 네가 한국에서 사는 걸 원치 않아.”

쩌모르윈은 거듭 말했고, 데비는 방긋방긋 웃었다.
쩌모르윈은 부평에 모텔을 예약했다. 장인장모에게 공장은 구경시키지 않을

작정이다. 150만원 가불받았고, 공장을 며칠간 또 빠지게 될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