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바람과 물

에루아 에루얼싸, 새만금[한겨레 펌]

색즉시공 2006. 3. 25. 13:33
달려라 냇물아

일요일이었던 지난 19일, 새만금에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형형색색의 깃발 들고, 봄이라지만 아직 바람 쌀쌀한 새만금 개펄에 사람들이 모였다. 어부도 아니건만 무슨 볼일이 있어 지난 10여 년 동안 그토록 자주 모이곤 했을까. ‘해창개펄 장승터’에서 방조제가 시작되는 곳까지 길가에는 “제발 살려 주세요”라고 쓴 깃발이 바닷바람에 찢기듯 펄럭였다. 죽이려는 자들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그 어조가 너무 간절하고 욕스럽기까지 해서 눈길을 멀리 수평선으로 돌렸더니, 밀물 들어올 때를 기다리는 개펄이 부드러운 속살을 다 드러내놓고 펼쳐져 있다. 개펄은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기만 하다. 거기 사는 ‘백합’에게 풀꽃상을 드린 지 6년째, 수십 차례 거기 갈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참으로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너른 땅이다.

이번에 모인 것은 지난 3월 6일, 대법원이 새만금 소송에 대해 원심 상고 기각 판결을 내리자 그 규탄과 대응 때문이었다. 한쪽에선 살판났다고 만세를 불렀고, 판결로 아무런 이익도 얻을 게 없는 환경단체 사람들은 오열했다. 환호작약하는 이들은 멀쩡한 땅과 생명을 죽이는 일이 곧 ‘발전’이라 믿는 사람들이고, 끝내 울음을 떠뜨린 이들은 그게 시대역행의 죄를 짓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럴 경우,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함부로 모욕해서는 안 된다.

선고 공판에서 법원은 “새만금 간척사업이 경제성이 없고 환경영향평가가 부실하게 이뤄졌다는 환경단체의 주장을 인정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 전제한 뒤, “반면에 토지 수요의 증대, 한계농지의 대체 개발 필요성, 쌀 수입 개방 등으로 인한 미래 식량 위기와 남북통일 등 국내외 여건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새만금 간척 사업은 타당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도 이젠 고쳐 쓸 수 없는 이 판결문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시대의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개펄은 밀물 때는 바다이지만, 썰물 때는 땅이다. 거기 갯것들이 살아 있고, 그 갯것들에 의지해 누천년 동안 사람들과 날짐승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땅이라 해도 참으로 특별한 땅이다. 어민들이 개펄이 곧 우리 직장이고 공장이라고 말하는 게 그 까닭이다. 그 땅은 거대한 자연정화조이면서 거대한 홍수조절 기관이기도 하다. 그런 거저 얻는 경제가치 말고도 심미적 가치 또한 따질 수 없다. 인류가 어리석게도 오랜 시간 동안 개펄을 간척의 대상으로만 대하다가 개펄가치에 새롭게 눈을 뜨고 ‘그냥 거기 냅두는’ 게 가장 올바른 태도라고 깨달은 것은 사실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법원은 수천만톤의 돌망태를 퍼부어 철옹성 같은 시멘트 방조제를 쌓는 일 자체가 자연환경을 치명적으로 능욕한 일인데도 ‘명백한 다른 환경파괴의 증거’를 더 내놓으라고 했다. 그 요구는 마치 강간을 해놓고도 ‘명백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우겨대는 강간범을 연상시킨다. 식민주의 시절, 유럽 열강이 먼 곳의 책상머리에 앉아 아프리카 국경을 제멋대로 직선으로 그어댔듯이 갯벌에 금을 긋고 땅 욕심을 냈을 때부터, 그보다 더 치명적인 환경적 영향은 다시없었다. 침략자들이나 개발주의자들은 직선을 선호하지만 자연은 그 본성상 곡선을 띨 수밖에 없다. 자연은 어머니처럼 생명을 품고 기르는데, 생명이란 바로 직선의 경직이 아니라 곡선의 꿈틀거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번 판결 직후 쓰여진 한 사설은 “신은 아름다운 생명의 피륙을 선물했지만, 대한민국은 갈갈이 찢어 걸레로 쓰기로 했다(한겨레 17일자)”고 했을까. 새만금 사태에 대해 이보다 더 시적인 통찰의 글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새만금은 결국 우리 시대 신문의 사설을 시의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이것도 소득일까. 소득이라면 참으로 쓸쓸한 소득이다.

‘새만금 사업의 취소’를 주장한 두 분의 대법관과 보충의견으로 ‘사업의 사정변경이 발생할 가능성’을 개진한 분들은 물론 우리의 이 비판에서 제외된다. 그렇지만 최종적 판결은 비극적이라기보다 차라리 희극적이다. 이 나라는 땅이 부족해 새만금사업 계속해야 한단다. 세계를 천년만년 쥐락펴락하려는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을 받자마자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농정을 접어버렸고, 그 뒤 급속하게 농지는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절박한 현실에 대해 대법원 판사들은 의도적 무지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갯벌은 이 나라 땅의 일부가 아니더란 말이냐. 그게 가만히 노는 땅이더란 말이냐. 일국의 사법부조차 갯벌을 ‘땅’으로 간주하지 않는 판인데 사익(私益)이 있는 곳이 바로 자신의 주소인 정치가나 건설업자들에게 어떻게 땅의 올바른 이해와 갯벌가치에 대한 통찰을 바랄 수 있을까. 미구에 닥칠 통일 때문에 간척사업이 필요하다는 말은 웃다가도 오한이 일 정도다. 통일에 대비해 편법으로 용도변경해 골프장 짓고 첨단 산업단지와 관광레저산업을 유치해야 한단 말일까. 게다가 공식발표는 아직 없지만, 그 땅에 미군기지마저 허락해야 옳단 말인가. 그게 눈부신 서해안시대의 내용일까. 판결문을 보노라니, 그들의 통일관은 통일형태 중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흡수통일관을 깔고 있어서 재판관들이 어떤 계층을 대변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드러내고 있었다. 이 판결문이 비록 새만금을 다루고 있지만, 21세기 초입 대한민국 지배집단의 황폐한 정신상황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 여기 있다.


19일의 항의집회는 그러나 꼭 비탄과 통곡만으로 점철되지는 않았다. 그토록 방조제 막으려고 기를 쓴다면 어디 막아보시라. 에루아 에루얼싸, 바닷물 막고 난 뒤에 일어날 끔찍한 일, 된장인지 똥인지 손가락으로 찍어본 뒤에 확인하시라, 에루아 에루얼싸! 천 여 명의 민초들은 노래 부르고 한바탕 축제처럼 놀았다. 집회가 절정에 이르던 오후녘, 조용히 밀물이 차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금(生金)밭’ 개펄이 진짜 보석처럼 햇살에 반짝거렸다. 에루아 에루얼싸, 눈물났다. 에루아 에루얼싸. 우리가 부른 노래와 춤은 새만금이 그냥 죽도록 포기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싸움을 다짐하는 결의의 표현이기도 했다. 방조제가 곧 닥칠 자연의 역습을 이겨낼까. 근년에 게릴라성 폭우로 둔갑한 홍수가 무엇보다 걱정된다.